정이 감상 후기
영화`정이`를 보았습니다.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가 집에 놀러 와 보자고 해서 본 영화인데 영화 흐름에 생각지 못한 감정선이 있어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누군가의 당황스러움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무례함
영화의 첫 장면은 정이 팀장이 빗발치는 총알과 로봇들의 공격을 뚫고 17번째 전쟁을 치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출중한 실력으로 훌륭한 공수를 펼치지만 막강한 상대의 전력에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심한 총상을 입은 채 쓰러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통스러운 신음을 토하던 정이는 어느 순간 그 고통을 훨씬 상회하는 당황스러움에 지배 당해 떨리는 눈으로 무언가를 쳐다봅니다. 찢긴 쇠붙이 팔과 그것들 사이로 터져 나오는 정체 모를 하얀 액체들. 해답을 찾지 못하고 고통을 잊어버린 듯 당황스러워하는 정이의 눈빛이 정지되고 전투복이 아닌 작업복을 입을 안정된 걸음으로 정희에게 다가옵니다. 그렇습니다. 정이는 40년 전 마지막 전투에서 이미 전사해 버린 세계적 영웅 윤정의 대체 로봇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시뮬레이션은 그녀의 뇌를 소유한 대기업의 사업 프로젝트에 일환이었을 뿐입니다. 정이가 17번째 죽음에 대항하며 맞서 싸우지만 끝내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자 그들은 AI 정이를 이것이라 저것이라 부르며 더욱 신랄하게 물건 취급을 해 댑니다.
동정 아닌 그리움
프로젝트의 수석 팀장 윤서현 박사가 들어옵니다.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멈춰버린 ai 정이를 바라보며 그녀의 눈가가 유난히 촉촉집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다름 아닌 35년 전 자신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쟁 용병으로 참가한 엄마를 떠나보낸 정이의 딸 윤서현이었습니다. 차마 흘릴 수 없었던 눈물의 의미는 창조물에 대한 동정이 아닌 매번 같은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이었습니다. 과거 성철 스님께서는 자신이 아끼던 난초를 빗대어 무소유 철학을 우리에게 설명하신 바 있습니다. 그렇게 한철 피고 지는 한낱 식물의 죽음도 도를 닦아 이름을 남긴 한 인간의 마음을 좌지우지 흔들어 버릴진대 하물며 제 몸과 영혼을 낳아준 어미가 17번씩 같은 자리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멀쩡할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강수연 배우의 섬세하고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는 장면이었습니다.

이젠 걱정하지 마세요.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고3 때 사고로 아버지를 떠나보낸 사연이 가진 이였습니다.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친구의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지금도 아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업을 하셨던 아버지는 원청 업체의 부도로 연계 도산을 당하셨던걸로 기억하는데 채무자들에게 쫓기는 중에도 자식들의 생계가 걱정되어 몰래 막노동하시고 월급날에는 몰래 밤에 오셔서 큰 딸인 제 친구의 가방에 돈을 넣어 두고 돌아가셨습니다. 가을이었습니다. 그날 담임 선생님이 빨개진 눈으로 복도에 서서 수업 중이던 친구를 부르셨고 불길한 예감에 사로 잡힌 듯 친구는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슬리퍼만 신은 채 체육 선생님의 차를 타고 어딘가로 갔습니다. 인근 병원에 도착했을 땐 뒤 따라왔더는 저는 점점 무서워지는 마음이 들었고 도저히 친구와 어깨를 나란히 걸어 나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어느순간 혼자 앞서 뛰어가는 친구를 뒤따라가 보니 평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다친 아버지가 온갖 알 수 없는 기계에 둘러싸여 누워계셨습니다. 터질 듯 부어오른 피멍 든 얼굴로 눈을 못 뜨신 아버지를 멀리서 바라보며 저는 집에 계신 엄마라도 불러야 하나하며 두려움에 휩싸였고 친구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는지 아니면 정말 못 알아본 건지 한참 멍하니 아버지를 내려다봤습니다. 그러다 잠시후 갑자기 뭔가를 발견한건지 갑자기 푹 엎드려 아버지를 안고 울기 시작했었습니다. 지금도 친구는 그때 아버지를 바로 못 알아봐 너무 죄송했다고 말하곤 합니다. 다행히 사고 며칠 전 친구가 직접 아버지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감아준 반창고가 때가 묻은 채 그대로 감겨 있는 걸 보고 알아챘다고 했습니다. 힘이 풀린 친구는 무릎을 꿇고 아버지 손을 잡고 늘어져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기계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담당의들이 뛰어오고 아버지에게 뭔가 알 수 없는 조치를 취하는데 기계음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저는 친구가 아버지를 너무 꽉 잡았나 싶어 그제야 친구를 떼어내려 성큼성큼 다가갔었는데 친구의 어깨를 잡고 일으키려던 순간 갑자기 통곡하던 친구가 몸을 벌떡 일으켜 아버지 귀에 대고 미친 사람처럼 뭐라 뭐라 중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친구가 미쳐버린 건가 싶어 너무 무서웠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친구에게 그때 왜 그랬냐고. 무슨 말을 한 거냐고 본 적 있습니다. 친구는 나름 담담 척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진 그 얘기를 할 때면 시선을 제대로 마주한 진 못합니다.
"아버지가 말은 못 하시는데 어느 순간 내 손을 꽉 쥐시더라. 의사가 골절이 심하다고 그랬는데 그 손으로 내 손이 얼얼할 정도로 힘을 꽉 쥐시더라고...아버지 말이 들리더라. 가슴으로."
막내를 낳다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10살 때부터 두 동생을 보살폈던 친구는 `너무 미안하다며 그래도 동생들 잘 부탁한다` 는 아버지의 마지막 부탁이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안함 가득 담긴 떨리는 진동에 얼른 일어나 아버지 귀에 대고 괜찮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합니다. 그렇게 지척의 공간에서 분명 나와 같은 감정을 나누고 있다 생각했던 친구는 완전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와 절절히 이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 속 정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미 온기 한점 남지 않은 기계의 몸이었지만 30년 만에 품는 딸을 그 옛날 그 방식 그대로 품는걸 느끼며 박사는 울컥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름도 없는 제3의 하찮은 감정이지만 영혼에 담긴 어미의 본능은 제 몸이 생사를 오가고 설사 형체를 잃어버려도 절대 지워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친구가 아버지께 드렸던 마지막 인사를 영화 속 정이의 딸이 하는 것을 보며 저는 옆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는 친구를 느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영화를 보기 전 고 강수연 배우나 김현주 배우에 대해 써볼까 계획했었는데 과한 감정 몰입을 당해 객관적인 품평은 하나도 쓰질 못했습니다. 멋진 품평 꺼리가 많은 영화였는데 아무래도 나머지는 여러분이 직접 느껴야 할것 같습니다. 고 강수연 님의 명복을 빕니다.